[칼럼] 변화, 학습, 그리고 지식공유
2022-03-231. 변화가 일어나는 조직에는 무엇이 있나?
수많은 조직이 자기 조직의 변화를 기대하고, 의도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변화라는 것을 어떻게 좀 더 잘, 쉽게 접근해 볼 수 있을까. 시스템 과학자이자 경영 구루로 불리는 피터 센게(Peter Senge)교수는 조직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변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개념을 언급하였다. 이는 ‘마음의 전환’(shift of mind)이자 ‘사고방식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핵심은 ‘이동과 전환’(shift)에 있다. 피터 센게가 메타노이아를 언급한 이유는 조직에서 일어나는 현상 중, 근본적인 마음의 전환과 이동을 수반토록 만들어주는 것, 곧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센게가 말하는 조직에서 일어나는 그 독특한 현상은 바로 ‘학습’(learning)이다. 우리가 학습하는 이유는 학습을 통하여 더 잘 생존하는 것, 나아가 더 잘 생존하는데 유익함을 얻는 것이지 싶다. 학습을 하는 조직은 그래서 그 생존과 적응을 위하여 ‘재창조’하고 ‘생성’하는 것에 탁월하다고 한다. 즉,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를 만들어내고, 만들어내는 능력을 키우는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 조직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기본 단위는 무엇인가?
일반적인 학습이 주로 적응을 위해 이해하고, 습득하고, 저장하는 것이었고,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면 조직에서의 학습은 단지 거기에만 국한되어서는 아쉬울 수 있다. 너무 거대하고 복잡하고, 모호하고, 빠른 환경때문이기도 하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인 부분이 많아서 현대사회의 조직은 팀을 업무단위로 구성하고 있고, 자연스럽게 팀은 학습의 기본단위가 되고 있다. 그래서 피터 센게가 엄격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팀이 학습하지 못하면 조직도 학습하지 못한다”는 말은 훈계가 아니라 사고현장에서 생존자를 하나라도 더 구하려는 구조대원의 절규처럼 들리기도 한다.
똘똘한 여러 구성원이 모여도 왜 그 총합이 한 개인의 지식과 지혜를 넘어서지 못하며, 함께 일하는 것은 왜 어렵기만 한 것인가. 팀으로 학습한다는 것은 곧 팀으로 일한다는 것이고, 이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함께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몫을 해내야 하고, 각자의 몫을 해내기 위해 진심으로 고민하고 해결을 도모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팀이 당면한 과업과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팀원들의 의견을 꺼내고 들어보고 그러는 가운데 새로운 대안을 발견하기도 하고 희열을 맛보는 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부디치는 현실은 여러 죄명이 씌워진 ‘상황이 어렵다’는 피드백리스트을 얻게되는 것이다. ‘학습된 좌절감, 심리적 안전감이 저조한 문화, 무능력한 리더, 자기중심적인 구성원, 동기부여 되지 않는 보상체계 등’이 그 주요 등장 죄목들이다. 팀이 학습하지 않아도 조직은 돌아갈 것이다(당분간은 아마도).
우리는 분명 잘하고 싶었고, 더 좋은 변화를 꿈꾸고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인간본성을 연구한 많은 연구자들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런데 팀학습이 중요하고, 팀단위 업무과제의 해결을 추진하고자 하지만 그저 팀으로 묶어놓았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3. 지식의 공유와 정보제공이 왜 필요한가?
팀으로 묶어만 놓고 왜 사람들이 잘 참여하지 않을까, 왜 말을 하지 않을까, 왜 해결되지 않을까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마치 엔진을 생략한 동체가 굴러가기를 기대하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 될듯 싶다. 이 상황에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여러 방안 중에 다급하고 중요한 3가지를 먼저 제시해보려 한다.
첫째, 역할이다. 바로 어떤 변화의 여정을 떠나보자고 제안하거나 말을 걸어주거나, 지원하려는 그 한 사람의 역할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는 리더, 동기부여자, 촉진자, 활동가라고 다양하게 불리울 수 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면 나에게 그 일이 다 몰려오게될까봐 시작을 못하고 서로 힘겨루기를 하게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더 열매없는 밀고당기기 게임이 될 수도 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함께 풀어가자고 공식화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에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조금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자 한다면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기술이나 퍼실리테이션 기술을 배워두면 좋다. 내가 모든 짐을 지지 않으면서도 팀원들과 효과적으로 역할을 나누고 협업할 수 있는 매우 실용적인 방식으로 변화를 도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팀에서는 누구나 동등한 입장에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니 이 역할을 굳이 팀장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리더십은 영향력을 미치는데서 발생하기 때문에 내가 먼저 움직였다면 나는 이미 그 팀에서 암묵적인 리더가 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둘째, 연결이다. 팀은 역할과 과업으로 이미 연결이 되어 있지만, 실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견을 주고받는 공유가 필요하다. 특히 이 부분은 그룹 프로세스의 핵심과정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이 된다. 이 때 참여하는 팀의 구성원들 사이에는 ‘지식공유’(knowledge sharing)가 일어나야 한다. 의미형성이론에서는 ‘지식’이라는 명사를 동사로 변하게 하는 것이 ‘지식공유’라고 설명한다(Brenda Dervin). 이는 팀원들이 지식이라는 표현을 각자의 주관적인 단어나 의미로 창조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식공유’는 서로의 업무를 잘 해내기 위해 구성원 각자가 시도한 다양한 방법과 그 경험을 통해 알게되고 체화된 노하우들, 즉 암묵적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암묵적 지식은 명시적 지식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욱 값지다. 그래서 지식공유를 문제의 인식, 정보의 수집과 분석 등 문제해결 장면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식공유를 시도하려면 ‘상호주의’가 기반되면 좋다. 즉, 지식을 공유하는 것을 통해 나도 나의 동료도 서로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어야하고, 공유를 위하여 나도 준비할 것인데 나의 동료도 준비할 것이라는 기대가 부합할 때 더 잘 진행될 수 있다. 함께 만나는 과업처리 현장에서는 각자가 보유한 경험과 노하우와 의견을 서로 잘 표현할 수 있게 돕고, 준비가 필요한 자료를 가져와야 할 때는 공유해야 할 내용에 대하여 범위와 수준을 같이 합의하여 진행할 수 있으면 상호주의 위에서 탄탄하게 지식공유를 촉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알게 하는 것이다. 과업관련 정보가 부족한 팀원에게 관련 업무의 논의나 결정을 맡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알게하는 것’이다. 함께 모여서 회의(會議)를 한다는 것에 회의(懷疑)를 품는 사람들은 간혹 이런 이야기를 한다. ‘모르는 사람들한테 물어서 뭐하나, 구성원들이 이것을 모르는데 참여는 시키라고 하고 답답하다, 잘 모르는 그들이 엉뚱한 결론에 이르면 우리만 힘들어지는 것 아닌가’ 등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그럴 때 조차도 의견을 나누고 참여를 시켜야 하는가에 회의를 품는다. 물론 적절한 대상이 적절한 업무를 맡아야한다. 그런데 팀으로 일할 때는 팀원들이 함께 그 역할을 나누어가져야 한다. 그 일에 팀원들을 함께 참여시켜 논의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참여자를 바꾸면 될 일이다. 참여자를 바꿀 수 없는 일이라면 그를 도울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에게 기술의 수련이 필요한 것인지, 지식의 공급이 필요한 것인지, 단지 제공되지 않은 정보가 있을 뿐인지 확인이 필요하고, 그에 맞게 제공하거나 변경을 해야한다. 그러기 전에 그가 배제당할 이유는 아직 없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분야에 초보자의 경험을 하며 발전해왔을 뿐이라는 것을 잊지말자. 조직개발 전문가들은 이런 경우, 조직 내 다양한 이슈를 해결하는 장면에서 구성원을 참여시킬 때, 정보가 부족하고 정보비대칭이 있는 경우 현명한 결정(informed decision)을 위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정보를 탐색할 여유를 제공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혼자서는 옮길 수 없는 산일지라도 팀으로 함께하면 그것이 지구라도 들어올릴 지렛대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팀이 각 팀원들의 누적된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고, 그 안에서 재창조되고 생성되는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낼 때 그들은 성취의 즐거움과 마음의 전환까지 이루어내는 메타노이아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간극을 메우는 그 역할에 누가 손을 들어볼 수 있을까